소식
NUCLEAR? NEW:CLEAR!

여는 글
안녕하세요. 부천의 청년공동체 피스오브피스는 2015년 9월, 생각을 나누는 책모임 ‘지음(知音)’에서 시작하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약 66권의 책을 읽은 7년의 시간 동안 책 속의 질문들과 마주하며 고민해왔고 주변의 세계로 시선을 돌려 함께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2020년 8월, 우리 시대의 평화에 대해, 환경에 대해, 꿈꾸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피스오브피스(Piece of Peace)’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우리시대의 광복과 청년의 평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8.15 광복절 행사’, 코로나시대의 고립된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 ‘저녁카페’, 크리스마스의 따뜻함을 나누는 ‘편지쓰기 캠페인’, 청년의 나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를 묻다’ 인터뷰 등 우리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부천의 청년 및 시민들과 함께 우리의 뜻을 나눠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전지구적 기후위기에 대응하여 환경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나와 자연의 관계를 생각해보며, 부천 지역의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우리는 ‘탈원전’에 대해 알아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원자력 발전이란 무엇인지, 맹목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원자력발전이 환경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우리가 바라는 지구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사토 요시유키와 다구치 다쿠미의 <탈원전의 철학>을 읽으며 함께 공부했습니다.
이번에 제작하게 된 「청년의 눈으로 바라본 탈원전 NEW:CLEAR」는 두 번째 환경 프로젝트(지구의 2030을 말하다 - 우린 벌써 지구를 위한 흐름을 타고있어!)로 피스오브피스의 5개월 동안의 여정과 고민의 흔적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나의 삶에 원전이 존재한다는 불안과 우리 모두의 생존에 대해 기존의 담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질문들을 던져보았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원자력 발전과 ‘탈원전’에 대하여 청년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만나는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
피스오브피스
짧게 읽는 <탈원전의 철학>
-사토 요시유키, 다구치 다쿠미-
탈원전의 철학은 핵, 원전, 공해 문제와 관련하여 1960년대부터 지속되어온 과학자들의 비판적 사유를 중심으로 원전을 설명한다.
원전과 핵무기는 다르지 않다.
저자는 원자력과 핵이 동일한 기술임을 설명한다.
원자력 발전에는 제어된 연쇄분열, 핵무기는 제어되지 않은 연쇄분열. ‘핵분열 연쇄반응’이라는 공통적 원리가 둘 안에 포함되어있다. 원자력 발전의 본질은 군사기술이기에 우선순위가 인간의 생명에 있지 않고 효율에 있다. 우리가 원자력 발전이라고 말하는 기술은 원자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이용해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원자력 발전과 핵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기술을 ‘평시 이용’과 ‘전시 이용’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기술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기술적 ‘동일’을 벗어나 원전과 핵무기가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가 원전사고의 환경오염과 핵무기의 환경오염의 피해 정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대표적인 원자력 사고인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경우 98만 5000명이 사망하고 40만명이 이주를 강요받았다(뉴욕과학학회). 또한 체르노빌에 의해 초래된 손실은 국가 예산의 32년분에 달한다. 또한 후쿠시마 1원전으로 부터 발생한 세슘-137의 방출량은 15,000 테라베크렐. 히로미사 원폭의 168.5개 분량이다. 이렇게 방출된 방사능 물질은 수만년~ 수백만년되는 반감기가 필요하다.
기술적, 존재론적으로 원자력 발전은 핵무기와 동일한 기술이며, 결국 방사성 물질을 축적시키는데 이것이 와해될 때의 누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그 결과를 수습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원자력 발전의 안전, 누가 책임질까
우리는 원전을 설치하기 위해 지진과 같은 외부적 요소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우리는 원전 사고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원전 사고를 ‘중대사고’와 ‘가상사고’로 구분한다. 중대사고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로 이 경우 방출되는 방사능 양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 반면 ‘가상사고’란 기술적 맥락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고다. 왜 중대사고에서는 방출되며, 가상사고에서는 일어날 수 없을까? 저자는 두 사고 모두 원전의 사고이며, 앞서 얘기한 과소평가와 사고 가능성의 부정은 결국 원전을 설치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한다.
원전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도 이와 같은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후쿠시마 사고는 원전을 설치하기 위한 과소평가와 사고 가능성의 부정이 만들어낸 대표적 사례다. 실제로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도쿄전력은 ‘상정 범위 밖’의 대규모 자연재해에 의한 사고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고에 대한 우려는 계속해서 제기됐다. <원전지진재해>라는 논문에서 규모 8등급의 대지진이 예측되는 지진에는 이미 하마오카의 원자로의 사고와 그로 인한 연쇄적 사고의 가능성을 지적했었다.
또한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대중이 입는 최대 방사선량을 20~100밀리시버트로 설정했다. 기존 일반 법령에 따르면 대중의 최소 피폭량은 1밀리시버트였으며, 원전 노동자의 백혈병 재해 인정 기준이 연간 5밀리시버트, 5년에 100밀리시버트 1년에 50밀리시버트였다.
일본 정부가 발표한 ‘100밀리시버트 이하로는 건강에 영향이 없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저선량 피폭이란 대부분 저선량의 피폭을 하면 그것이 몇 차례로 나뉘어 긴시간에 걸친 피폭이 되면 안전하다는 주장 때문에 저선량 피폭은 ‘건강에 영향이 없다’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피폭의 영향은 누적적이다. 실제로 20년 이상 총 100밀리시버트 이상의 피폭을 한 집단은 암사망의 과잉률이 높다.
그럼에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방사선량을 재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대 피폭량을 재설정함에 따라 피난 지역을 최소화함으로써 후쿠시마시와 경제 중심지인 고리야마시를 피난지역으로부터 제외했는데, 이를 통해 정부는 원전 사고와 관련된 사회적 비용과 복구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인구 전체 차원의 경제적-사회적 이익을 우선시하고 허용치라는 수치를 통해 인간이 죽을 가능성을 용인한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결국 허용치라는 개념은 과학적 개념이 아닌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임을 지적한다.
결국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볼 때, ‘원전 지진재해’와 같은 맥락에서 안전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국가와 자본의 ‘논리구조’ 내에서 그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그 외의 모든 우선순위는 부인한다. 요약하면, 국가와 자본은 원전을 위해 안전 이데올로기 만들어내고, 실제로 원전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가능성을 사후에도 부인하고 있다. 따라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났을 때,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형성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안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안전한 척’ 살아가고 있다.
원전사고는 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가
앞서 확인했듯이, 원전 사고는 중대사고라는 최악의 사고를 가정하면서도 가상사고라는 사고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사고 확률이라는 것은 절댓값의 개념은 아니다. 사고라는 것은 0또는 1이기 때문이다. 사고 확률을 계산하기 위한 결함수 분석은 사고에 이르는 과정의 각각의 사태를 독립된 것으로 다루지만, 화재나 지진과 같은 복합적 요인에 의해 모두 고장이 나는 것은 제외하고 있다. 현대의 거대 첨단 시스템은 모두 긴밀하게 만들어져 여유가 없다.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한 저자는 원전 사고가 여러 면에서 국가와 자본의 구조를 그대로 승인하고 답습하게 되는 공해의 구조와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공해는 과학적인 현상이기 이전에 복합적인 사회현상이다. 전쟁의 수행이 공해의 부인으로 이어지고 공해의 피해는 확대된다. 고도의 경제성장은 공해의 발생을 전제함으로써 가능했고, 전문가들은 공해의 발생을 좁히려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결국 공해를 공해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하여 피해를 줄이려는 가해자의 사고에 불과하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서는 살충, 제초 등 인간의 편의를 위한 과학기술을 통해 오염 메커니즘이 실증적으로 존재함을 주장했으며, 군사 기술과 화학 물질의 관계는 필연적이고 전쟁과 공해는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음을 지적했다. 저자는 원전 역시 핵무기와 동일하며 원전으로 인한 사고, 공해 매커니즘의 필연성으로 인해 원전사고는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탈원전의 철학>을 읽고
- 원자력과 핵무기는 동일하며, 원전 사고는 전쟁과 비견될 만한 대재앙임을 인식해야 한다.
- 원자력으로 인한 위험과 죽음을 부인하는 과정을 멈추고 부인의 반복강박, 자기기만을 치유해야 한다.
- 현재세대의 ‘행복’이 미래 세대의 ‘희생’ 위에 성립하는 구조를 인식해야 한다.
- 원전 문제는 국가와 자본 논리에 의해 가해자가 피해자의 처우를 결정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한국의 원전 현황
2022년 기준,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는 고리, 월성, 신월성, 새울, 한빛, 한울 총 6곳이며, 원자로는 총 30기로 가동 중 24기, 영구정지 2기, 건설 중 4기 총 30기다.
| 운영현황 | 발전소명 | 지역(시군) |
| 가동 중 | 고리 2, 3, 4호기 | 부산 |
| 신고리 1, 2호기 | ||
| 신고리 3, 4호기 울산 | 울산 | |
| 월성 2, 3, 4호기 | 경주 | |
| 신월성 1, 2호기 | ||
| 한빛 1, 2, 3, 4, 5, 6호기 영광 | 영광 | |
| 한울 1, 2, 3, 4, 5, 6호기 울진 | 울진 | |
| 건설 중 | 신한울 원전 1, 2호기 울진 | 울진 |
| 신고리 원전 5, 6호기 울산 | 울산 | |
| 운영 중지 | 고리 1호기 | 부산 |
| 월성 1호기 | 경주 |
원자력발전소 정지 현황
| 발전소명 | 지역(시군) | 비고 |
| 고려 1호기 | 부산 | 영구정지(2017.06.18) |
| 월성 1호기 | 경주 | 영구정지(2019.12.24) |
원자력은 발전량으로는 국내 원자력발전의 원년인 1978년에 2,324GWh를 발전하여 전체 발전량의 7.4%에 불과했으나, 2021년도에는 158,015GWh를 발전하여 전체 발전량의 27.4%를 차지하고 있다.
Q. 우리는 원전과 함께 생존할 수 있을까?
원전, 생존에 관한 이야기
박지인
원전사고를 겪은 후쿠시마의 땅은 사고가 발생한지 1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준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다. 논과 밭, 도로, 강 등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후쿠시마의 산림지역은 제염이 불가능해 후쿠시마를 재오염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후쿠시마 제1원전 내부에는 원자로에서 생성된 다량의 스트론튬-90을 처리하지 못하고 남아있다. 원전사고가 발생한지 36년이 지난 체르노빌도 여전히 방사능 오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체르노빌 주변의 자연은 황폐화되어있다. 체르노빌의 원자로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덮어 간신히 방사능 유출을 막고 있는 상태이며 인근 30km 이내는 출입금지구역이다. 이제 스무살이 된 나는 앞으로 경험해보고 싶은 것 알아가고 싶은 것도 많다. 그러나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의 사례를 보며 앞으로 지구는 생명이 살아가지 못하는 환경이 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나만 이런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닌것 같다. 나와 같이 앞으로의 생존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는 10대 20대 청년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까지 원전을 이야기하며 생존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왜 원전 이야기는 경제, 정치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던것일까?
2022년 7월 28일, 글로벌 생태발자국 네트워크에 따르면, ‘지구의 세계용량 초과의 날’ 중 가장 빠른 날짜에 우리는 지구의 1년치 탄소 자정 능력에 해당하는 탄소를 전부 배출했다. 지금 우리 지구의 공기에는 미세먼지가 가득하고 바다 한가운데에는 쓰레기 섬이 존재한다. 동식물의 68%가 사라졌고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숲은 황폐해졌다. 지구의 허파 아마존의 숲마저 파괴가 가속화되고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 발생 대규모 산불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상기후로 인한 식량난이 현실이 되었고 지구는 계속해서 뜨거워지고 해수면도 점차 상승하고 있다.
우리의 생존이 점점 위협받고 있는 지금, 생존의 관점에서 원전을 다시 이야기해보고 싶다.
더 이상 원전을 이야기하며 경제적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정치적 갈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과연 우리는 원전 혹은 원전이 남긴 방사능 폐기물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어떤 것인지. 원전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누렸던 편리함을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하고싶다.
나는 돈이 많이 들더라도, 더 불편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 세상, 오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숲과 나무들이 무분별하게 잘려나가지 않는 세상, 바다 쓰레기가 없는 세상, 공기가 미세먼지로 가득하지 않은 세상, 다양한 생물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세상, 자연이 곁에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Q. 원전은 왜 멀게만 느껴질까?

원자력발전소를 창문 너머에 두는 일
이온유
정주하 작가의 사진에는 바다에서 천진하게 다이빙을 하는 아이들과, 그 너머 돔 모양의 원자력발전소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진전 <불안, 불-안, A Pleasant Day>(2008)에 전시되었던 이 사진들은 어딘가 낯설다. 대한민국에는 1978년부터 원자력발전소가 있었지만 누군가의 일상 곁에 원자력발전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색하기만 하다.
대한민국에는 총 30기의 원전이 있지만 부천에서는 원자력 발전소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누군가의 삶에 이리도 가까이 원자력발전소가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창문 너머로 보이지 않는 원자력발전소가 삶의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이렇게 원자력발전소는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망각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일상에서 원전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원전의 불안에 대해서도, 탈원전에 대해서도 나와 실제 관련있는 일처럼 여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원자력발전소가 눈에 보일만큼 가까이 있지 않기에 안전하게 느껴져서일까? 혹은 우리는 정말 원전이 불안하지 않은 것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원자력발전소가 자연 상태 이상의 방사능을 뿜어내지 않고, 오히려 도심보다 방사능 수치가 낮다는 자료들을 제시한다. 이로 인해 원전에 대한 불안은 과도한 염려처럼 여겨진다. 실제론 위험하지 않지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원전은 우리의 삶에 실제 존재한다는 것, 둘째, 원전 사고 또한 실제 존재한다는 것이다. 1940년부터 3대 사고라고 불리는 스리마일(1979.03.28), 체르노빌(1986.04.26), 후쿠시마(2011.03.11) 원전 사고 이외에도 임계사고, 냉각수 누출, 노심 융용, 배관 파열, 폭발 등으로 인한 방사능 누출과 피폭 사고는 거의 매년 일어났다. 즉,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은 과도한 염려가 아닌 실재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실재하는 원자력발전소의 위험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생생한 불안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에, 이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위험을 자각하는 것은 생생한 불안을 낳는다. 불안은 이야기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생생해지기 때문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두렵다. 때문에 위험이 ‘일어날 수도’ 있는 가능성보다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하는 위험과 불안을 없애는 일이 아닌 외면하고 억압하는 일일뿐이다.
프로이트는 실제 외부 세계에서 받는 위협이나 위험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현실불안(reality anxiety)’라고 명명하였고, 현실불안은 실재하는 위험요소를 제거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실제 존재하는 위험인 원전에 대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을 여러 이유로 부인한다. 망각된 원전의 실존과 함께 불안을 잊음으로써, 원전의 위험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불안 자체를 외면함으로써 불안은 부인된다. 부인된 불안은 표현되지 못한 상태로 억압되고, 이렇게 불안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다시 해결되지 않은 위험 앞으로 회귀하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사라지지 않은 위험에 대한 불안은 잊혀졌을 뿐이며, 언젠간 결국 잊혀진 위험과 불안 곁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불안이 잊혀질수록 원전의 위험과 거대한 불안 앞에 다시 서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불안이나 공포감을 느끼고, 무너져내려 오열하게 되고,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한다. 때때론 마치 이미 다른 일에 불안한 사람처럼 실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일보다 더 많이 걱정하고, 초조해하곤 한다. 이와 같이 큰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러한 현실 불안들이 사회 안에서 용인되며 마음을 병들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자력발전소’라는 실재하는 위험에서 비롯된 현실 불안을 모두 공유하고 있으며, 현실불안을 당연하게 여길수록 우리는 더욱 아파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현실 불안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실재하는 위험을 바로 없앨 수 없을 때 불안을 낮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의식에 억압해두었던 불안을 직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억압과 회귀를 그만두고 원자력발전소가 내포하고 있는 불안을 직면해야 한다.
불안을 직면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원전이 실재한다는 것, 원전 사고는 불가피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또한 일어나왔던,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나’의 일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개인과 상관없어 보이는 사회적 사건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사건과 관련하여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개인은 반드시 사회적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결국 원전과 관련된 사고들을 나의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에게, 그때,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나에게, 나의 역사에, 나의 나라에 일어난 일이어야한다. 마치 우리집 창문 너머에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것처럼 그 실재를 직면하고 인식할 때, 나의 삶에도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불안이 있음을 인정할 때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불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두렵고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안을 이야기해나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가지는 긍정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두려움에서 벗어나 나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용기가 있고, 건강한 방향으로 승화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타인을 위하는 이타심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청춘들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불안의 두려움을 넘어서 창문 너머 원자력발전소를 바라보고 설 수 있다.
그리고 마치 감기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가볍게 얘기해보자.
“괜찮아? 나는 사실 불안해.”
Q. 과연 탈원전은 찬반의 문제일까?
탈원전은 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이 됐나.
김성재
“탈원전 해야지. 탈원전은 우리에게 필요해”
누군가 나에게 탈원전을 물어보면 당연하게 대답했다. 어디선가 접하거나 언론을 통해 들어왔던 정보들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탈원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던 적도, 탈원전에 대해 질문해 본 적이 없음에도 당연하게 찬성을 얘기해왔다. 탈원전에 대한 고민없이 탈원전을 지향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그저 내가 선택한 입장의 논리를 그대로 전달했다.
’탈원전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단순히 전달하는 것을 넘어 ‘탈원전’이라는 말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단순히 주장과 근거를 찾고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탈원전은 무엇인지, 탈원전을 지향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해볼 수 있었다.
우리가 원자력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핵이다. 원자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고’는 대재앙과 다름없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위험과 피해를 준다. 그리고 그 피해로 인한 책임은 국가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국가가 국민에게, 타국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방사능 허용치 조정’, ‘강제 이주’, ‘오염수 해양방출’ 등 지역 주민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까지 불안을 안겨다 주었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나라에서 ‘탈원전’은 요원하다. 탈원전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가치는 경제적 논리 앞에서 힘을잃어가며 탈원전은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허황된 목소리에 불과해 보인다.
과연 지금까지 한국의 원전, 탈원전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돼 왔을까. 언제부터 탈원전이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하나의 의제가 되었으며 상투적인 찬반의 문제가 되었을까. 그리고 권력을 감시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저널리즘을 행한다는 언론은 탈원전을 어떻게 비추고 있을까.
<표1: 우리나라 시기별 원자력 발전 공론화 과정>
| 시기 | 담론 |
| 1945~1961년 | 원자력은 첨단 과학 기술의 상징 |
| 1962~1976년 | 원자력의 신화화,선진국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
| 1977~1993년 | 원자력 안전 문제에 처음으로 의문이 제기,언론을 통해 공론화되기 시작 |
| 2000년대 초~ | '부안 방폐장 유치 갈등','고리원자력 발전소 블랙아웃 사고' 등원자력 발전소를 둘러싼 사회 갈등의 시작 |
1945년부터 1993년까지는 원자력은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아닌 우리 사회의 미래와 직결된 신기술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97년~ 1993년 사이에 안전 문제 의문이 제기되며, 언론을 통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부터는 크고 작은 사고들로 국민적 관심사가 높아지고 탈원전을 외치는 목소리가 생겼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보수정부 시기, 원자력 관련 정책에 대해 정부와 에너지 공기업 등과 환경보호단체, 탈핵을 지지하는 정당 간의 갈등이 고착화되면서 보수 대 진보의 정치적 대립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진보 정부시기인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탈원전 정책을 공약하면서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대립의 중심에는 사회적 현실을 재구성하는 미디어와 언론이 자리를 잡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이해관계자와 환경보호단체가 각각 주장하는 탈원전에 대한 찬성과 반대입장은 보수・진보 언론을 통해 재생산되며, 국민들에게 보수와 진보의 입장으로 명확히 인식된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추진에 대해 각각 보수와 진보로 대표되는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보도를 비교하면 그 양상이 너무나 다르다. △경제·산업적 측면 △안전 측면 △신재생에너지 측면 △환경보호 측면 등 탈원전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부딪히고 있다. 이 중 우리가 탈원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로 이야기하는 경제·산업적 측면과 안전 측면 관점의 기사들을 비교해보았다.
<표2: ‘조선일보’와 ‘한겨레’ 탈원전 관련 보도 제목>
| 조선일보 | 한겨레 | |
| 경제・산업담론 | '한국, 탈원전 이후 원전 수출 어려울 것' '10여년 안에 원전 인력 1만명 사라진다.' | '툭하면 멈춰선 원전, 납품비리・부실시공 탓에 17조 날렸다' '독일 탈석탄, 50만 광부 일자리 대안 제시해 성공했다' |
| 안전담론 | '인재로 밝혀진 한빛 1호기 사고, 탈원전 지속되면 실수 반복될 것' | '원전 밀집지역에 잇따르는 지진 정말 괜찮은건가' |
<한겨레>와 <조선일보>는 탈원전의 경제성, 일자리, 전력 공급, 원전 수출 등 원전 및 탈원전으로 인한 경제 산업 부분 전반에 걸친 내용에서 대립한다. <조선일보> 기사와 사설은 탈원전 정책은 원전 기술의 사장으로 일자리 손실을 불러오고, 원전 수출에 악영향을 미쳐 천문학적인 손실을 초래한다는 내용을 보도한다. 반면 <한겨레>는 <조선일보>의 주장을 반박하며, 독일 사례를 통해 탈원전으로 일자리가 늘고 산업이 활성화된다는 내용의 기사와 ‘원전의 불안정적인 전력 공급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더욱 크다는 논조를 편다.
안전 측면에서는 <조선일보>는 탈원전 정책이 원전 인재 수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안전 사고(한빛 1호기 사고)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 <한겨레>는 우리나라 원전 밀집 지역과 잦은 지진을 연관지으며, 원전의 근본적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와 같이 탈원전에 대해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다양한 인용 사례를 제시하며 각각 보수와 진보의 입장을 공고히한다. <조선일보>는 공격적으로 탈원전 정책 및 주장에 균열과 변형을 꾀하고 있으며, <한겨레>는 탈원전을 지지하며 조선일보의 주장을 방어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두 언론사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경제, 산업적으로 긍정, 부정적이라는 영향을 당연하게 가정하고 자신들의 주장에 불필요한 정보는 배제하고 은폐한다.
그렇다면 각각의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만났을 때, 과연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질까. 독자들은 무엇이 가정인지, 배제되고 은폐된 정보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기 힘들다. 따라서 상대방이 자신이 주장하고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해 반박하거나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 힘들고 질문 자체보다는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탈원전‘에 대한 논의가 아닌 탈원전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며, ’보수와 진보‘ 입장의 문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성향에 따라 탈원전에 접근할 수밖에 없고 탈원전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상투적인 찬반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탈원전‘ 자체에 대한 우리의 질문과 고민이다.
탈원전을 지향한다는 것은 단순히 원전을 폐기하겠다는 것이 아닌 다른 대안을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는 결국 미래를 변화시켜 왔다. 민주주의, 교육, 성평등, 언론의 자유 등은 과거에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우리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가치이다. 실제로 선진국을 결정하는 요소는 경제적 기준이었지만 현재에는 민주주의지수, 교육수준, 문맹률, 언론자유지수, 성평등 지수 등 국가의 정치 문화적 상황 등을 모두 고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또 어떤 요소들이 포함될까. 과연 30년 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원전을 통해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이 미래의 중요한 요소일까.
탈원전은 사회적으로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상투적인 찬반은 합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30년 후에도 여전히 원전을 운영할 것인가. 우리 미래에는 원전만 없으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원전은 꼭 필요한 것인가? 우리가 인터넷, 언론을 통해 쉽게 접하는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서 편집된 것이다.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질문이다. 탈원전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무엇인가?
이런 다양한 질문이 시작된다면, ’탈원전‘은 현실을 모르고 하는 이상론자들의 요원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Q. 그럼 이제,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부천과 프라이부르크 -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조현준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시대의 전환은 쌓여있는 시대의 토양 위에 새로운 질문이라는 꽃 한송이를 피우는 것과 같은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생존을 위한 경제 발전과 경쟁적인 기술 발전의 토양 위에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기주의와 공감의 부재, 능력주의와 소외의 문제 등 다양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더 많은 것만을 원했던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무엇을 원하고 싶은지' 나의 바람을 더 큰 차원에서 점검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년으로서 부천 지역사회에 탈원전 논의가 부재한 것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전세계적 에너지 위기 등, 원전 위기와 에너지 안보에 관한 국제사회의 현안은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밀접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원전에 관해 찬성 또는 반대라는 단순한 선택의 입장에 머물러 있었을 뿐 지속적인 관심과 원전 건설에 관한 시민들의 인식 공유는 부재했다. 국가의 원자력 발전이 경제발전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여겨지는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다시 돌아보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지역 사회 내에서 공동의 논의는 국가주도의 발전 정책을 재점검하고 스스로 무엇을 원했는지 돌아보게하는 힘이었다. 그 예로 1970년대부터 지속되어 온 독일 프라이부르크 지역의 탈원전 논의를 들 수 있다. 1970년대 당시 이탈리아의 연구소 로마클럽은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를 발표하며 인구증가, 자원고갈, 자연훼손으로 인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했고,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통해 제초제 DDT의 위험성이 전세계적으로 알려져 환경과 성장에 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라이부르크 근처의 빌(Buhl)에 원전이 건설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프라이부르크 대학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은 원전으로 인한 주거 환경의 오염과 지역내 포도경작의 문제 등을 우려하며 대규모 원전 건설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운동은 단순한 원전 반대 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환경보호와 경제 성장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과 체제를 모색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시민들의 주도적 참여로 녹색주거단지를 형성하고, 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태양의 집'을 건설하는 등, 시민들의 참여는 지역의 기업들과 지방정부의전환을 이루어냈다.
프라이부르크는 대학생과 시민들의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미래지향적이고 새로운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창조했으며, 현재 유럽의 대표적인 '환경 도시'로써 환경과 경제가 공존하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의식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문화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표1: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시기별 논의 과정>
| 1960년대 | 성장주의, 산업주의에 대항하여 '생태', '환경보존'의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가 프라이부르크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 |
| 1970년대 | 시민단체 대표들의 의견교류 및 연대와 통합위원회의 형성을 통해 독일 환경운동의 중심적 역할 수행 |
| 1980년대 | 핵발전소 건설 철회, 프라이부르크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체 에너지에 관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친환경 도시 프라이부르크'로의 전환 선언녹생당 창설(1984) |
| 1990년대 | 독일 최초로 환경부시장을 두었으며, 환경관련 문제를 시와 협력 |
프라이부르크의 참여의식과 시민들의 환경의식은 단순한 원전정책의 반대가 아닌 독일의 에너지정책의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다. 프라이부르크의 녹색 운동은 독일의 녹색당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고, 2020년 독일의 탈원전 선언을 이끈 뿌리이다.
현재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수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유럽의 국가들이 원전정책으로 회귀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미래지향적 목소리와 새로운 에너지정책으로의 전환의 요구는 당면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나은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속가능한 힘이며 무엇을 원했는지 스스로의 방향성을 재점검 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
프라이부르크는 50년의 시간 동안 시민들의 힘으로 탈원전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우리와 같은 대학생 청년들이었다. 우리는 세계적인 흐름을 따라가기만 할 것인가?
전 세계적으로 탈원전을 실현할 미래를 상상해보자, 나는 그 과정에 있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책자가 훗날 부천의 환경과 탈원전 이야기에 있어서의 시작점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탈원전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던 2022년 봄은 부천 청년들의 환경과 미래에 관한 책임의 시작이다.
우리는 멈추지 않고 부천의 지속 가능한 도시로의 전환을 실현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임할 것이다.
닫는 글
여러분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우리는 원전에 대하여 무엇이 더 이점이 많은 선택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구조에서 벗어나,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원전이 나의 생존의 문제라는 것, 원전의 존재를 인식하고 불안을 인정하는 것, 찬반이라는 이분법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보다 가치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것,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원하고 싶은 세상을 이야기해나가는 것까지.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러분 또한 바라는 세상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스오브피스는 2030년까지 기후위기에 대응하며 탄소중립을 위한 걸음을 걸어나갈 것입니다. 자연과 공존하는 인간으로서, 자연의 일부로서 이 땅과 하늘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논의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갈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길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나라에, 세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걸음에 함께해주세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모든 청년들을 응원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대의 평화를 빕니다.
피스오브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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