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월간와이북클럽 5월 발제문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 서두 —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 전후 가족의 식탁
- 1950년대 — 학교와 권위
- 1968년 5월 — "세상의 첫해"
- 이혼의 목록
- 디지털 시대의 도래
- 메타-결말 — 그녀가 쓰려는 책
서두 —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전쟁 후 이브토, 폐가 부근의 커피를 파는 막사 뒤에서 대낮에 몸을 웅크리고 오줌을 싸다가 일어나 팬티를 입고 치마를 올리고 카페로 돌아간 여자 / 영화 〈이처럼 긴 부재〉에서 조지 윌슨과 춤추는 알리다 발리의 눈물 가득한 얼굴 / (…) 루앙 대시계 거리에 있는 앙드레 신발 가게, 받침대 위에서 회전하는 신발과 그 부근에 계속해서 나오는 똑같은 문장: 〈베이비부츠와 함께라면 아기는 잘 걷고 잘 자란다〉 / (…) 1952년 뤼르 도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해된 엘리자베스 드럼먼드의 장면 / 꿈속까지 따라오는 실제 혹은 가공의 상(像)들 / (…) 80년대 중반, 파리 팔레드도쿄의 전시실 벽에 걸려 있던, 수용소로 출발하기 직전에 행정부가 찍은 수백 명의 경직된 얼굴들 / 릴본느 주택 뒤뜰의 강 위에 있던 화장실, 그 주변을 찰싹거리는 물에 천천히 떠내려간 휴지에 섞인 배설물들 / (…) 방금 살해한 양키 군인을 계단에서 질질 끌던 ― 출산할 멜라니를 위해 의사를 찾아 애틀랜타 거리를 뛰어다니던 스칼렛 오하라의 장면 / 남편 옆에 누워서, 남자아이가 입을 맞추자 '좋아, 좋아, 좋아'라고 말했던 첫 키스의 추억을 떠올리는 몰리 블룸의 장면 / (…) 잊어버렸어야 하는, 잊기 위해 노력한 탓에 오히려 다른 것들보다 더 끈질기게 기억에 남은 끔찍한 문장, '너는 늙은 창녀 같다' / 학교 친구들 곁에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사라졌던 이들 사이에서 우리가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장면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자식들의 추억 속에 손자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기억은 성적 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 존재한다는 것은 목이 마르지 않아도 마시는 것 / 2001년 9월 11일,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 in illo tempore 일요일, 미사에서 / (…) 더는 쓰지 않는 표현들, '한물간 사람', '소란을 피우다', '천 냥의 가치야!', '이 얼간이야!'. 우연히 다시 들으면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은 것처럼 갑자기 소중해진다. (…)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질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쌓인 사전은 삭제될 것이다. 침묵이 흐를 것이고 어떤 단어로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입을 열어도 '나는'도, '나'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계속해서 세상에 단어를 내놓을 것이다. 축제의 테이블을 둘러싼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저 단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며, 먼 세대의 이름 없는 다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점점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 이 책의 첫 문장은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보통 회고록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로 시작하는데, 에르노는 왜 미래시제로, 그것도 '사라진다'는 말로 시작했을까요?
- 첫 부분에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 ― 카페 뒤에서 오줌 누는 여자, 영화배우의 얼굴, 신발 가게 광고 문구, 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의 사진 ― 이 다 같이 줄지어 나옵니다. 너무 사소한 것과 너무 끔찍한 것이 같은 자격으로 적혀 있어요. 왜 이렇게 섞어 놓았을까요?
전후 가족의 식탁
전쟁이 끝난 이후 명절, 느리게 이어지는 한없이 긴 식사. 이미 시작된 시간은 무(無)에서 빠져 나와 구체화 됐다. 부모들은 이따금씩 우리에게 대답하는 것을 잊고 초점 없는 눈빛으로 우리가 없었던, 우리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그 시간, 옛날을 응시하는 듯했다. 손님들의 뒤섞인 목소리는 함께 겪은 사건들로 거대서사를 만들었고, 마침내 우리는 그 일들을 직접 본 것처럼 여기게 됐다.
배고픔과 두려움이라는 공통된 기저를 두고, 모두가 '우리(nous)' 그리고 '사람들 혹은 우리들(on, 불특정 다수)'이라는 단어를 쓰며 이야기했다.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페탱에 대해 말했다.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페탱을 잡으러 갔을 때, 그는 이미 너무 늙었고 노망이 나 있었다고. 그들은 비행기와 하늘을 돌던 V2의 굉음 소리를 흉내 냈고, 과거의 공포를 몸짓으로 표현하면서 대화 중 가장 극적인 순간에 손에 땀을 쥐게 하려고 '내가 뭘 했을 것 같아'라고 말하며 꾀를 부렸다.
42년의 겨울은 아무리 말해도 모자랐다. 추위, 배고픔, 루타바가, 보급용 식량, 담배 교환권, 폭격 / 전쟁을 알렸던 북쪽의 여명 / 패주 길의 자전거들 그리고 수레들, 약탈당한 가게들 / 사진과 돈을 찾아 잔해를 뒤지는 이재민들 / 독일인들의 등장 ― 각자가 정확히 어느 곳, 어떤 도시였는지를 말한다 ― 항상 예의 바른 영국인, 거침없는 미국인, 독일 협력자, 레지스탕스에 참가한 이웃, 해방 때 머리를 삭발당한 여자 X / 폭격을 당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아브르, 암시장 / (…) 죽은 말을 타고 코드백의 센 강을 건너서 탈출한 독일군들 / 독일인이 있는 열차에서 시원하게 방귀를 뀐 시골 여자
그들은 예전의 대전쟁, 피와 영광 속에 승리했던 1914년 전쟁, 식탁에 있던 여자들이 경외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었던 남자들의 전쟁과 비교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 그들은 영웅적 행위와 불행에 대해 논쟁했다.
죽음과 폭력, 파멸이 넘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희희낙락하며 이야기하다가도 때때로 즐거움을 부인하려는 듯이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돼'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엄숙하게 말했고, 그 후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어두운 순간을 향해 경고라도 내리는 듯이, 마치 즐긴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먹고 마시면서 그들이 본 것만을, 회상할 수 있는 것만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알고는 있지만 본 적 없는 것들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재능 혹은 신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에 아우슈비츠행 기차에 올라탄 유대인 아이들도, 바르샤바 게토에서 아침에 거둬들인 아사한 시체들도, 히로시마의 1000°도 말하지 않았다.
전설의 시간에 비교하면 ― 그들은 머지않아 패주, 피난, 점령, 상륙, 승리의 일화들이 일어난 순서를 잊게 된다 ― 자신들이 자란, 이름 없는 그 시간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살아 본 적 없는 그 시간에 대한 끈덕진 아쉬움을 간직했다. 타인들의 기억은 그들이 간발의 차이로 놓친, 언젠가 살아 보기를 희망했던 시대를 향한 비밀스러운 향수를 안겨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오, 작은 백포도주〉와 〈파리의 꽃〉을 불렀다. 후렴구 단어들을 울부짖으며, '파란색, 하얀색, 빨간색은 우리 조국의 색'을 귀가 찢어질 듯 합창했다. (…)
아이들은 이야기를 듣지 않고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식탁을 떠났다. (…)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 어른들은 식탁에서 전쟁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직접 전쟁을 겪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책은 "마침내 우리는 그 일들을 직접 본 것처럼 여기게 됐다"고 적습니다. 겪지 않은 일을 어떻게 '내 기억'처럼 가질 수 있을까요?
- 어른들은 전쟁의 끔찍한 이야기를 신나게 하다가, 가끔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돼"라고 엄숙하게 말하고 잠시 침묵합니다. 그런데 책은 "그들은 본 것만 이야기했고, 아우슈비츠나 히로시마는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해요. 왜 같은 사람들이 끔찍한 자기 경험은 신나게 말하면서, 더 끔찍한 다른 사람들의 일은 말하지 않았을까요?
1950년대 — 학교와 권위
종교는 인생의 공식적인 틀이었고 시간을 지배했다. 신문들은 사순절 기간 메뉴를 제안했고, 금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일요일 예배에는 내의를 갈아입고 새 옷을 입으며 모자, 가방, 장갑을 착용하고,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자리였다.
옷차림으로 여자아이와 10대 소녀를, 10대 소녀와 처녀를, 처녀와 젊은 여성을, 어머니와 할머니를, 상업 노동자들과 관료를 구분했다.
공립, 사립 할 것 없이 학교는 비슷했다. 침묵 속에 불변의 지식을 전하는, 질서와 위계를 존중하며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장소: 블라우스를 입는 것, 종탑 앞에 줄을 서는 것, 선생님이 들어오면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사감이 들어오면 일어나지 않는 것, 규정에 맞는 노트, 펜, 연필을 준비하는 것, 겨울에 위에 덧입는 치마 없이는 바지를 입지 말아야 하는 것. 질문할 권리는 선생님에게만 있었다. 단어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었다. 우리는 엄격한 규율에 제약을 받으면서 갇혀 있는 것을 특권으로 알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 교육을 찬양하는 말 속에는 어디에나 '인색한 분배'가 감춰져 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옆자리에 앉았던, 실습생 혹은 피지에 학교 학생이 된 여자애를 길에서 만나면, 우월한 환경의 상징인 겨울 스포츠를 즐기고 돌아와 피부색이 노랗게 된, 학교 밖에서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회계사의 딸에게 그랬던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우리는 엄격한 규율에 제약을 받으면서 갇혀 있는 것을 특권으로 알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지금 보면 답답해 보이는 학교 규칙을 그때 학생들은 왜 자랑스러워했을까요?
- "교육을 찬양하는 말 속에는 어디에나 '인색한 분배'가 감춰져 있었다." 학교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끝까지 공부할 수 있는 사람과 중간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갈렸습니다. 학교의 두 얼굴 ― 평등하다는 말과 실제로는 갈라낸다는 사실 ― 은 어떻게 동시에 작동했을까요?
1968년 5월 — "세상의 첫해"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며,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보고 듣게 됐다. 오래전부터 허용된 규정에 따라 사용됐던, 특정인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장소들, 대학, 공장, 극장이 모두에게 개방됐고 그곳에서 토론하기, 먹기, 잠자기, 사랑하기 등 본래의 용도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제도적이고 신성한 공간은 더는 없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 젊은이들과 늙은이들, 간부들과 노동자들이 서로 말을 섞었으며 위계질서와 거리감은 대화 속에서 기적적으로 녹아버렸다.
시험이 치러졌고, 기차가 굴러갔고, 석유가 다시 흘렀다. 우리는 휴가를 떠날 수 있게 됐다. 7월 초, 버스로 역에서 역을 지나 파리를 건너던 지방 사람들은 그들 밑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제자리에 놓인 포석을 느꼈다. 몇 주가 지나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몸을 흔들지 않는 매끄러운 아스팔트가 깔린 것을 보았고, 그 많던 포석들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궁금해했다. 십 년 동안 있었던 일보다 두 달 사이에 더 많은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빠트렸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 아니면 그렇게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격동의 내일을 믿기 시작했다. 그것은 몇 달, 기껏해야 일 년이면 일[어날 일이었다]. 가을은 뜨거울 것이고 그러고 나면 봄이 온다(더는 생각하지 않을 때까지, 훗날 낡은 청바지를 발견하고 '68년 5월에 입은 것'이다라고 말할 때까지).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긴 것 중에 어느 하나도 자명한 것은 없었다. 가족, 교육, 교도소, 직장, 휴가, 광기, 광고, 모든 현실은 검토를 받게 됐다. (…) 사회는 순진하게 기능하기를 멈췄다. 차를 사고, 해야 할 일들을 적고, 출산하는 것,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 책은 68년 5월에 대해 거대한 정치 이념(자유·평등)을 말하는 대신, "대학·공장·극장이 모두에게 열렸고 그곳에서 토론·먹기·잠자기·사랑하기를 했다"고 적습니다. 왜 사상 대신 공간 사용법의 변화로 혁명을 묘사했을까요?
- 68년이 지나가고 그녀는 적습니다 ― "두 달 사이에 십 년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지만, 우리에게는 뭔가를 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빠트렸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 아니면 그렇게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것인지도." 혁명이 끝난 뒤의 이 모호한 말투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이혼의 목록
그녀들은 매혹적인 쇼핑센터로 돌아가서 결혼과 육아로 멀어진 세상의 모험에 다시 노출된 자신들을 발견했다. 남편도 아이도 없이 휴가를 떠나고 싶었지만, 여행을 하고 혼자 호텔에 머문다는 생각이 그녀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마다 모든 것을 떠나 혼자가 되고 싶은 욕구와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렸다.
헤어짐을 결심하기 전에는 몇 달 동안 또 다른 부부싸움과 지겨운 화해, 친구들과의 대화가 필요했고, 결혼할 때 '우리 집에는 이혼이란 없다'고 경고했던 부모님들에게 집안의 불화를 용의주도하게 알려야 했다. 이혼 과정에서 나눠야 할 가구와 전자제품 목록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왔음을 알렸다. 우리는 15년 동안 쌓아둔 물건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카펫 300프랑 / 전축 10,000 / 수족관 1,000 / 모로코 거울 200 / 침대 2,000 / 안락의자 1,000 / 약을 정리하는 수납장 50, 기타 등등우리는 상품 가치 〈이제 이건 아무 가치도 없어〉와 사용가치 〈내가 당신보다 차가 더 필요해〉를 두고 다뤘다. (…) 예전에는 냄비에서 침대 시트까지 구매할 것들을 적은 목록이 장기적인 결합을 증명해 줬다면, 이제는 나눠 가져야 할 것들의 목록이 헤어짐을 구체화했다. 목록은 부부생활의 종말을 인증했다.
다음 단계는 변호사와의 상담이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법적인 언어로 바꾸어서, 단번에 결별에서 격정적인 요소들을 걸러 내 진부함, '익명의 공동체의 붕괴'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 이혼하는 부부가 변호사 앞에서 가구·가전 목록을 만듭니다. 카펫 300프랑, 전축 10,000, 수족관 1,000… 이렇게 가격까지 매겨가며요. 책은 슬픔이나 분노 대신 이 가격표를 길게 보여줍니다. 왜 이혼을 물건 목록으로 묘사했을까요?
- 변호사를 만나는 장면에서 책은 적습니다 ― "법적인 언어로 바꾸어서, 단번에 결별에서 격정적인 요소들을 걸러 내 진부함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변호사 사무실에 가면 왜 갑자기 내 비극이 평범한 일처럼 느껴질까요?
디지털 시대의 도래
[쇼핑센터는] 거래하다, 세일을 활용하다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원칙이었고 의무였다. 대형 마트와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 쇼핑센터는 삶의 중요한 장소가 됐다. 고갈되지 않는 물건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곳, 조용한 쾌락, 폭력 없는, 근육질의 힘이 센 경비들이 지키는 곳.
우리는 늙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떤 것도 노화에 이를 정도로 충분히 오래가지 못하고 교체됐으며, 전속력으로 재개발됐다. 기억은 그것들을 삶의 순간에 결합시키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신상품들은 더 이른 시기에 진열] 코너에 나타났고, 크리스마스 장난감들은 만성절 다음날에 그리고 2월에 수영복이 나왔다. 물건들의 시간은 우리를 빨아들였고, 우리는 끊임없이 두 달을 앞서 살아야 했다.
모든 새로운 물건 중에 핸드폰이 가장 기적적이었고 가장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언젠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어디에서든, 언제든 전화를 걸 수 있을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길에서 핸드폰을 귀에 대고 혼자 말하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 RER의 열차 안에서 혹은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처음으로 가방 안에서 벨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깜짝 놀랐고, 부끄러움과 불편함으로 몹시 흥분해서 OK 버튼을 찾았다.
새로운 물건에는 몸과 정신에 가해지는 폭력성이 있었고, 사용하면서 금세 지워졌다. 물건들은 가벼워졌다. (늘 그렇듯이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질문없이, 쉽게 사용한다.)
우리에게 타자기, 타이핑 소리와 부속품들, 수정 테이프, 스텐실, 카본지는 생각할 수도 없는 너무 먼 시대에 속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카페의 화장실에서 X에게 전화했던, 저녁에 올리베티로 P에게 편지를 타이핑했던 몇 년 전을 떠올리면, 핸드폰과 메일의 부재가 인생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 책은 "우리는 늙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떤 것도 노화에 이를 정도로 충분히 오래가지 못하고 교체됐기 때문이다"라고 적습니다. 물건이 빨리 바뀌면 왜 사람이 늙지 않는다고 느끼게 될까요?
- 핸드폰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길에서 통화하는 모습을 이상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곧 책은 "핸드폰과 메일이 없던 시절이 인생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다"고 적습니다. 새로운 물건이 들어오면 왜 그 전 시절은 곧바로 비현실처럼 느껴질까요?
메타-결말
어떤 면에서 그녀는 말과 장면, 물건들, 사람들을 지우면서 매우 늙은 노인들이 그렇듯이 망가져서 나무들과 그녀의 아들들, 손자들을 나이에 의한 황반변성 때문에 다소 흐리게 응시하고, 모든 문화와 역사, 그녀의 것과 세상의 것들을 빼앗긴 채로 혹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날짜도 달도 계절도 모르게 되는, 언젠가 이르게 될 망가진 상태를, 그것이 아니라면 죽음을 이미 예견하고 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대에 이 땅 위에 살다간 그녀의 행적을 이루고 있는 기간이 아니라 그녀를 관통한 그 시간, 그녀가 살아 있을 때만 기록할 수 있는 그 세상이다.
그것은 연속적이고 절대적이며, 삶의 마지막 장면까지 점차 현재를 집어삼키는 반과거 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글 속에서의 '그녀'는 거울 속, 사진 속의 끊임없는 타인에 해당[될 것이다].
그녀는 이 세계가 그녀 안에 새긴 것들과 그녀와 동시대를 사는 이들, 아주 오래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슬며시 미끄러져 온 시간을 공동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 공동의 기억에 대한 기억을 개인의 기억 속에서 되찾으며, 역사를 경험한 측면에서 표현하기 위해.
그녀가 일종의 '비개인적인 자서전'으로 보는 이 글에는 어떤 '나'도 없다 ― 그러나 일반적 의미의 '사람들'과 '우리'가 있다 ― 마치 이번에는 그녀가 지난날의 서사를 얘기하는 것처럼.
아니 에르노는 말했다. 글쓰기를 멈추는 것은 당신 없이도 계속되는 시간의 기울기와 속도에 다시 빠지는 것이라고.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글쓰기를 '하강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제자리에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쓰다듬거나 지나간 것들을 불러들이는, 즉 회상의 과정이 아닌, 시간의 결을 스스로 거스름을 말하는 것이다. (…) 그러니 책의 첫 문장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라는 그녀의 예언은 틀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장면은 여기, 그녀만의 언어로 기록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 책의 첫 문장은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였습니다. 그런데 옮긴이는 후기에서 정반대로 적습니다 ― "모든 장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요? 아니면 두 말은 사실 같은 뜻일까요?
- 마지막에 그녀는 자기가 "쓰려는 책"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나'도 없다 ― 그러나 '사람들'과 '우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설명이 나오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책을 다 읽은 상태입니다. 왜 책 끝에 가서야 "이런 책을 쓰겠다"고 말하는 걸까요?